금요묵상말씀(성경Q.T)
◈ 사도신경
◈ 찬양 / 새찬송가 – 312장(너 하나님께 이끌리어)
◈ 말씀 / 시편 72편 2
2. 그가 주의 백성을 공의로 재판하며 주의 가난한 자를 정의로 재판하리니
◈ 마음 열기 <하나님의 공의>
72편은 왕이 정의와 공의로 다스리면 백성들의 지지와 평화 행복이 보장될 것이라는 교훈임과 동시에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질 공의로운 하나님의 나라와 그 백성들이 누릴 축복에 대한 예언입니다. 72편의 주제는 한 마디로 공의와 정의입니다. 우리는 흔히 정의를 절차적 정의와 분배적 정의라고 생각합니다. 절차에 있어서 정당하면 그 결과는 정의로우며 누구에게나 균등한 기회가 보장되어 있으며 누구에게나 똑같은 분배가 이루어진다면 그것을 정의롭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할까요? 성경이 말하는 공의란 공평한 추. 공평과 정의. 뇌물이나 압력을 배제하는 것. 정당한 권리 보장 또는 변호해주는 행위를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세상이 말하는 공평함이 정의라고 생각하는 것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모두를 똑같이 대하는 것이 정의의 기본 원칙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부자도 가난한 자도 성전세를 내야 합니다. 가난하다고 해서 면제하지 않습니다. 부자라고 해서 판결을 굽게 해서도 안 되지만 가난하다고 판결을 굽게 해서도 안 됩니다. 공평한 저울추가 바로 법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공의를 행하는 것은 궁핍하거나 환난을 당한 자의 권리를 지켜주는 것입니다.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공평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똑같이 균등하게 대해야 그것이 정의일 텐데 성경은 가난한자와 궁핍한 자들에 대해 책임적인 모습을 공의로운 행동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성경의 공의는 사법적 공의가 아니라, 회복적 공의이기 때문입니다. 역차별이라는 말이 많이 등장합니다. 가난한 계층의 아이들이 가진 교육적 환경이 부유한 아이들보다 유리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에게 일정부분의 점수를 가산해서 대학에 갈 수 있도록 해주자, 자신들의 몫을 빼앗겼다고 생각한 부유층의 사람들이 내건 항변의 논리가 바로 정부의 처사가 정의롭지 못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공평하게 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을 차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겠지만, 지금은 경제적 여건이 되지 않으면 공부하기기 쉽지 않습니다. 따라서 가난으로 인하여 생긴 차이를 일정한 점수를 더하여 균등하게 맞추어주는 것이 더 정의롭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성경은 무조건적인 평등과 균등의 정의보다는 가난한 자와 환난을 당한 자에 대한 관심을 촉구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공의입니다.
우리는 공의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 이번에 필리핀 사람들을 작고 무식하다고 욕한 한국사람 때문에 필리핀 사람들의 반발이 거세다고 합니다. 이에 한국 사람들이 사과하는 댓글을 많이 달고 있다고 하니 다행이기는 합니다. 이런 것이 바로 공의입니다. 나보다 더 어려운 이웃들이 재난 지원금을 받을 수 있다면 함께 격려해주는 것이 하나님 백성의 공의입니다. 그는 하나님 나라의 축복과 평화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73편은 다윗 시대 성가대 대장 아삽이 백성들을 향하여 노래한 지혜서입니다. 악인이 형통하고 잘되는 모순된 현실에 대해 의문을 표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악인은 갑작스런 멸망을 당하게 될 것이며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것이 참된 복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시인은 우리들의 일반적인 감정을 잘 보여줍니다. 악인들이 형통하고 죽을 때도 근심 없이 편하게 죽는 것 같은 모습을 보며 단단히 시험에 듭니다. 15절에 보면, 자신도 그런 악인들처럼 될 뻔 했다는 심경이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굉장히 솔직합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거짓된 방식으로 돈을 벌고 잘 되면 배가 아픕니다. 3절에서 시인은 그들을 보고 질투했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들처럼 살고 싶은 유혹을 느꼈습니다. 우리도 의롭지 못한 사람들을 따라 그들처럼 잘 살고 싶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그런 유혹이 바로 빠져들지 않고 심각하게 고민합니다. 왜 악인이 형통하고 잘 되는가 고민하고 연구하였으나 머리만 터질 것 같습니다.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는 성소에 들어가서 깨닫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17절입니다.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아멘. 성소에 들어갔다는 것은 두 가지를 의미합니다. 성전은 기도하는 곳입니다. 시인은 성전에 들어가서 기도하며 깨닫게 되었습니다. 둘째, 성전은 말씀이 있는 곳입니다. 시인은 말씀을 묵상하며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그것은 곧 종말론적인 깨달음입니다. 악인은 결국에 하나님 앞에서 망합니다. 그것도 순식간에 철저히 괴멸합니다. 하나님이 없으면 그들이 마지막까지 잘 살았다고 할 것이나 공의의 하나님 앞에서 악인들은 영원한 저주 가운데 멸망하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행복할지라도 그들의 영혼은 벗어날 수 없는 멸망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28절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함이 내게 복이라’ 아멘.
우리 성도님들도 교회에 다니지 않았으면 세상 사람들처럼 악을 행하고라도 성공하고 싶은 유혹을 받거나 그런 현상을 이해하지 못하고 억울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인이 성전에서 깨달았듯이 우리 성도는 교회에 오심으로써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것이 가장 큰 복이며, 멸망으로 향하는 저들의 삶이 결코 행복하거나 부러움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악인들의 형통을 부러워할 필요 없습니다. 그들은 설혹 이 땅에서 잘 된다고 하더라도 영원의 삶에 비하면 찰나에 불과한 영광을 위해 그들의 영혼을 사탄에게 저당 잡힌 가련한 자들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구원받은 백성으로 행복하게 그리고 의롭게 살아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 묵상기도.
주님, 하나님의 백성답게 공의롭고 정직하게 살게 하소서. 손해 볼지라도 영원한 나라의 의를 위하여 그리고 하나님을 향하여 정직하고 바르게 살게 하옵소서. 나보다 연약한 자들을 가엾게 여기는 공의로운 마음을 주옵소서. 공의로우신 하나님, 영육간 연약한 성도들에게 공의를 베푸시어 속히 회복되어 건강한 자들과 동일한 평화를 누리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주기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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